어느 토끼의 겨울밤
강경아
학다리 오일장에 다녀오신다더니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시지 않아요 영산포 나룻배는 잘 건너셨을까요 흰 눈 펑펑 쏟아지는데 먼 길을 어찌 오가시려는지요 문밖을 한참 서성여요 언 발가락을 종종거리며 깡충깡충 뛰어요 또다시 마중 나가려는데 두 살배기 동생이 칭얼대며 울먹여요. 나도 덩달아 눈이 벌겋게 부풀어 올라요 굶주린 소리를 어르고 달래요 그리움도 별빛으로 물이 드는데 엄마는 오시지 않고 문풍지가 방문을 때리며 다그쳐도 쫑긋쫑긋 자꾸만 자라나는 귀, 바싹바싹 마른 귀, 오도독 오도독 고드름 같은 귀, 삐쭉삐쭉 날이 서는 귀, 몰아치는 눈보라에 먹먹해진 귀, 찬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토끼 네 마리, 방문 앞을 지키고 서있네요.
아이, 영순아, 영순아
저 멀리 희미하게 들려오네 울엄마 오시는 소리 들려오네 서른두 살 과부인생, 살아보겠다고 휘날리는 눈보라 앞세우며 장사 밑천 한 보따리 머리에 이고 돌아오시네 미끄러질세라 꽁꽁 고무신을 동여맨 새끼줄이 다 풀어진 채, 손을 흔드시네. 홀로 차가운 눈밭을 깡충깡충 걸어오시듯 내게로 오시네 따스한 장작불 같던 온기는 어디로 가고 차디 찬 링거를 달고 오시네 흰 눈 지그시 밟으시며 돌아오시네 열 네 살 내 유년의 속살을 찢고 고통으로 오시네 남은 모든 생(生)이 전이된 채, 내게로 오시네 문풍지처럼 떨고 있는 나를 보고 손을 흔드시네 손을 흔드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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