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팩
정숙인
1.
중심을 잡기위해 벽을 붙들었다. 생명을 느낄 수 없는 검은 벽은 서늘했다.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퍼지는 차가운 전율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은 화석 속에 깃든 무언가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중심을 잃지 않으려 벽을 붙든 내 모습이 더 이상 생식기를 쓸 수 없는 늙은 거미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아니었다. 그가 내게 보낸 상자, 내가 짊어진 상자를 생각했다.
2.
일제강점기의 일본군들은 경제적 수탈을 위해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이 터널의 건설을 부역시켰다. 한 정 한 정씩 떨어져나간 고통의 흔적은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터널을 뚫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차갑게 잊힌 검은 기억들이 터널의 천정에서 바닥까지 벽을 타고 내렸다. 통행하는 차량과 행인을 위해 설치된 불빛은 푸르스름했다. 그 때문인지 거대한 수용소처럼 음울했다. 내가 상자를 받던 날, 외할머니는 내게 마래터널을 알려주었다. 외할머니가 나보다 더 어렸을 때, 만성리로 가는 이 길은 암흑천지였다. 사람들은 한낮에도 그믐밤처럼 벽을 붙들고 귀를 곤두세우며 걸을 뿐이었다. 오래전 그들은 이 벽을 더듬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차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산소처럼 들이마셨다. 차들의 전조등과 후미등은 점점 더 규칙적으로 패턴화 되었다. 어지러웠다.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다시 벽을 붙들어야 했다. 아아. 누군가가 내 손끝을 쳤다. 벽, 벽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었다. 벽을 붙들 때마다 터널 부역자들의 터진 손이 만져졌다. 한 손 한 손, 또 한 손, 끝없이 내 손을 붙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그들의 손끝은 뜨거웠다. 나는 더 이상 마래터널이 두렵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들려줬던 그 시절처럼 부역자의 손을 더듬으며 터널을 빠져나왔다. 나의 할머니처럼.
3.
암자로 오르는 길의 바위들은 거북의 등처럼 예외 없이 풍화가 되어있었다. 새벽 여명은 바람의 흔적을 쓰다듬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비틀거리다 기댄 바위에서는 마래터널에서 내 손을 붙들던 손의 흔적이 만져졌다. 날이 새면 여수엑스포역으로 가서 용산행 KTX를 타야 한다. 그리고 입대해야 한다.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지민의 이름을 지웠다. 관음전 앞의 하늘이 붉어졌다. 날이 밝고 있었다. 백팩의 상자를 꺼냈다. 손을 얹었다. 상자를 열어 아버지의 뼛가루를 날렸다. 하늘로, 바다로, 경계가 없는 곳으로. 바다에도 하늘에도 눈시울이 있었다. 가슴이 화끈거린다. 여수야아. 귓가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에서 들려오는 게 분명했다. 해무 위로 뜨거운 것이 젖어들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서 문이 열리고 있었다.
해가 떠올랐다. -소설 <백팩>에서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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