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중앙동과 교동의 모습입니다.>
제 유년의 봄에는
배고팠던 기억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지금이야
냉장고 문을 열면 언제든지 저를 기다리는 먹거리가 있지만
제 유년에는 밥 외에는 달리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섬에 살았던 제 친구들은
배가 고프면 바다에 가서 전복을 잡아먹고
소라를 잡아먹었다고 자랑하는데 도시의 변두리에 살았던 저는
달리 먹거리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배고픈 사람들에게
봄날의 하루해는 유난히 길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것이 일이었던 당시에
저는 항상 허기가 졌습니다.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그 시절에
그나마 간식이든 주식이든 고구마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담요 밑에 삶은 고구마가 없던 날은
생고구마를 낫으로 깎아 먹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생고구마를 먹고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는 낯선 아이가 서있었는데 그 아이의 얼굴엔
마른버짐이 피고 입가엔 고구마 전분이 하얗게 묻어 있는 아이였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도
항상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책가방을 던져놓고 밖으로 나가 한참을 놀다가 돌아와도
역시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홀로 가정을 꾸려나가시던 어머니는
항상 일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수에는 쥐치가 참 많았습니다.
제 어머니는 쥐포공장을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여수경제의 한 축을 쥐치가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별다른 일거리가 없던 그 당시에
쥐포공장은 많은 주부들에게 쏠쏠한 부업거리가 됐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들 중에는 '쥐고기(쥐치) 장학생'들이 참 많았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아이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그렇게 혼자 몸으로 아들 6형제를 키웠습니다.
형제들에게 배부른 삶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제 중 누구도
그러한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불평한 형제는 없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어머니의 힘듦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한
우리 어머니의 몸부림은 어쩌면 가난을 이겨내기 위한
처절한 전투였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도 가난해서 마음까지도 척박했던
제 유년은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마음만은 늘 행복했습니다.
마음은 행복했어도 생활은 늘 고달팠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중학교에
갈 형편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중학교에 안 보낼 수는 없고
검정고시를 합격해야 중학교 졸업자격증을 주는
여흥고등공민학교라는 학교에 저를 입학시켜 주었습니다.
그 학교는 지금의
충덕중학교에 있던 학교였습니다.
제 기억에 그때 한 달 학비가
3,200원이었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돈을 벌기위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신문배달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 동안 신문배달을 하면
월말이 되면 월급이 3,400원 나왔습니다.
저는 그 돈을 벌기 위해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나보다 3살 많은 형도 신문배달을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신문배달을
시작한 날은 겨울이었습니다.
겨울바람이 차갑게 불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날마다 신문배달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일 수는 없었습니다.
신문배달을 저보다 먼저 시작한
저의 형은 어린 제가 늘 걱정이었습니다.
형은 제가 신문을 배달할 가정이 150가정이라면
신문배달을 시작하기 전에 정확하게 152부의 신문을
제 품에 안겨주면서 말했습니다.
“신문배달을 모두 끝내면 2부만 남아야 한다.
3부가 남으면 네가 1가정을 배달하지 않은 것이고,
4부가 남으면 2가정을 배달하지 않은 것이니 정신 차리고 배달해라.”
형으로부터 이렇게 세심한 주의를 받았지만
신문배달이 모두 끝나면 제 손에는 어김없이
3부 이상의 신문이 남았습니다.
몇 가정을 빼먹고 배달한 것입니다.
14살의 어린 저에게는 처음부터 한 집도 빼먹지 않고
배달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신문 배달구역은
여수역 앞에서 시작해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중앙동 로터리 부근에서 끝났습니다.
당시 17살이었던 형은
그런 동생이 늘 걱정되어 저보다 배달 부수가 많았음에도
신문배달을 일찍 끝내고 중앙동로터리에서
항상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은 저보다 먼저 도착해 있으려고
아마도 뛰면서 신문배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손에 남아 있는 신문부수를 확인하고
어느 가정이 빠졌는지를 항상 복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는
버스비 대신에 신문 1부를
버스 기사님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바람이 몹시
불었던 날로 기억합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저는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처음부터 끝까지 뛰었습니다.
배달을 모두 끝내고
중앙동로터리에 도착하니
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피할 곳도 없는 곳에서
형을 기다리는데 14살의 저는 너무나 추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별 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혼자 집으로 와버린 후에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장소에 도착한 형은
동생이 아직 배달이 덜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저를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제가 너무나 추웠으니
형도 몹시 추웠을 것입니다.
형은 오랫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는 동생에 대해
혹시 사고나 나지 않았는지 걱정으로 기다렸을 것입니다.
저는 벌써 집에 도착해서
아침밥을 먹고 등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아침밥을 먹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데
그때서야 형이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때 교복을 입고
태연히 집을 나서는 의리 없는 동생을 보고
형은 저에게 뭐라고 한 마디 했을 것입니다.
그때 형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착한 형이었기에 그리고 항상 고생하는 동생을 가엾게
생각했던 형이었기에 심하게 얘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저는 제가 형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나보다 훨씬 더
공부를 잘했던 형은 그날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학교에 갔을 것입니다.
그랬던 제가 신문사를 창간하고
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세상을 향해 여러 가지 말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어느 지역아동센터 선생님이
어느 날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표님은 왜 그렇게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세요?”
그 질문에 저는 그냥 말없이 웃기만 했습니다.
혹시 그 선생님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 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제가 쓴 글이 될 것입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은
항상 저의 유년시절을 회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저로 하여금 착하게 살도록
바르게 살도록 늘 채찍질을 합니다.
그래서 저의 말과 저의 글에는
세상을 다독거리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가끔은 거침없는 얘기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제 마음 안에는
아직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꽁꽁 언 손을 불어가며 열심히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
14살의 어린 소년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by 장터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