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짧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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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추억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기도

관리자 0 569 2020.08.29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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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동현 作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분 중에 한 분이

제 어머니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합니다.


제 어머니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홀로 되셨습니다.

40대 초반이면 너무나 젊은 나이이지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 나이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겨진 유산도 없이 홀로 6형제를 키웠습니다.


말이 쉽지 이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집에 돈은 없지,

어린 자식들은 날마다 돈 달라고 하지,

말도 안 듣지, 이러한 자식들을 키우면서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골백번 엎드려

절을 해도 부족한 마음입니다.


그래도 자식들이

반듯하게 잘 성장했습니다.

6형제가 언성 한 번 높이는 일이 없이

서로 우애 있게 지내고 있습니다.


형들은 동생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하고

동생들은 형들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형수님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동생들은 무조건 형수님 편입니다.

형님들이 뭐라고 해도 동생들은 무조건 형수님 편을 들고

좋은 것이 있으면 형수님들 먼저 챙겨드립니다.


그리고는 못난 우리 형님 만나서

우리 형수님이 고생이 많다며 형수님들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그러니 형수님들도 당연히

시동생들을 친동생 같이 좋아합니다.

형수님들이 시동생들을 좋아 하니 형제간에

우애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6형제가

서로 우애 있게 사는 방법입니다.

모두가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지혜이고

고귀한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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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적에 우리 집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어머니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을 사리거나 일을 가려서 할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어떻게 어린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키워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돈이었는데

어머니 혼자서 그 많은 일을 감당해 내신 것을 생각하면

저는 지금도 그 어머니 생각에 목이 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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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에 어머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신 것 같습니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소위 윗녘장사라고 하는 일도 하셨습니다.


윗녘장사는 한 번 짐을 챙겨서 떠나면

3~4일씩 걸리는 장삿길을 의미하는데 어머니께서는

동네 아주머니 두세 분과 짝을 이뤄서 장사를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장삿길을 떠나기 전에

여수에서 많이 생산되는 미역이며, 김이며,

멸치며 각종 건어물을 보자기 보자기에 가득 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것은

등에 메고 어느 것은 머리에 이고

또 어느 것은 손에 들고 어머니는 기차를 타고

윗녘장사를 떠나셨습니다.


그 당시 너무나 어렸던 제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까닭은 어머니가 혹시

이대로 집을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약간의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너무 속을 썩이면

아궁이 앞에서 남 몰래 치마로 눈물을 훔치시는

어머니 모습을 자주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따리를 이고지고

떠나는 어머니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는 골목어귀에서 울지도 못하고 붙잡지도 못하고

떠나가는 어머니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은 제 기억 속에

흑백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요즘같이 집전화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에

장사를 떠난 어머니는 그 물건을 다 파실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루에도 열댓 번씩

어머니가 돌아올 길목에서 사슴의 눈망울과 목으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으면

저는 세상 모든 것이 시시했습니다.

노는 것도 심심하고 밥 먹는 것도 심심하고

아무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없는 집은

빈방처럼 썰렁하고 찬밥처럼 시들했습니다.

어머니가 집에 없으면 저는 풀죽은 핫바지 같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어머니를 기다리는 시간에

어머니는 그 많은 물건들을 이고 지고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을 찾아다니고 계셨을 것입니다.


어린 새끼들을 집에 두고

집 떠난 어미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그렇게 일을 해야 했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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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부를 수 있는 것은 행복입니다.

“엄마”하고 불렀을 때 “오~냐”하는 소리로

돌아오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머니를 부르면

모든 것이 채워집니다.

엄마 하면 밥이 나오고 엄마 하면 돈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김종철 시인은 엄마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기도라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장사를 갔다가

조금의 돈이 모아지면 제일 먼저 자식들 먹일 보리쌀부터 산 다음에

자식들 양말도 사고 떨어진 고무신도 사고 그랬습니다.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그 시절에

어머니는 참으로 안간힘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새벽마다

제가 듣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였습니다.


새벽에 가장 맑은 물을 떠서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새벽 기도소리에

잠에서 깼다가 잠들었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이렇게

아프고 시린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치마 끝을 잡고 마냥 행복했던 기억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가 제 곁에 안 계십니다.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만 하시다가

암으로 떠나신지 올해로 36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줄어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어머니를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제게는 너무나 그리운 분입니다.


by 장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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